카테고리 없음 / / 2024. 3. 17. 01:49

완전을 부인하는 해석에 대한 반박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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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고전 2:6)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 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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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기독교에는 완전(온전)해 질 수 있다고 보는 해석과 완전해 질 수 없다는 해석 이 두 가지로 나뉘어 질 수 있다.

대부분 완전(온전)해 질 수 없다는 해석을 지닌 학자들이 많다.

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 온전해 질 수 있다는 해석이 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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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대부분 학자들의 견해 :

고전 2:6절에 나오는 지혜의 의미를 예수님(혹은 복음)이라고 본다.

고전 1장, 고전 2:6-8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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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고전 1:30)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 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 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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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고전 2:6)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 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

(고전 2:7)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

(고전 2:8)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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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but 지혜는 복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.

(지혜는 그리스도와 복음이 맞다.

위에서 언급한 고전 1장, 2장을 보면 그리스도, 복음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.

하지만, 단지 복음, 그리스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.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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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전 14:19-20절을 보면 지혜는 깨닭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.

그리고 그 지혜는 수준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.

(지혜에는 장성한 사람이 되라.(고전 14:20) -> 지혜에 장성할 수 있다.

지혜는 장성한 것과 어린 아이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.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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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고전 14:19)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 남을 가르치기 위하여 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

(고전 14:20) 형제들아 지혜에는 아이가 되지 말고 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 장성한 사람이 되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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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지혜가 만약 복음이라면, 왜 다시 전하는가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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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:6, 2:13절을 보면,

(고전 2:6)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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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고전 2:13)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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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혜를 말한다, 가르친다고 되어 있다.

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를 말하고, 가르친다고 되어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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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혜가 복음이라면, 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말하겠는가?

왜 다시 복음을 가르치겠는가?

이미 고린도 교회 성도들은 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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즉 여기서 나오는 지혜는, 심오한 진리를 전했다는 말이다.

성령님이 주시는 복음의 진리, 말씀들의 깊은 진리들을 전했다는 말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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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, 복음에 대한 지혜가 어린아이와 같이 낮았기에, 성령님이 주시는 심오한 복음에 대한 진리들을 가르쳤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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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지난 시간에 신령한 자들은 온전한 자들이라고 말씀 드렸다.

(고전 2:15절을 통해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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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고전 2:15)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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많은 학자들은 신령한 자들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교회 모든 성도들을 포함시킨다.

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2절 뒤에 나오는 고전 3:1을 해석하지 못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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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고전 3:1) 형제들아 내가 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 너희에게 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

(고전 3:2)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

​

3:1절을 보면 바울은 신령한 자와 너희를 구분하고 있다.

그렇다면 신령한 자와 너희와는 다른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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많은 학자들은 2:15절의 신령한 자와 3:1절의 신령한 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.

말도 안되는 이야기다. (2절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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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의 장과 절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, 성경이 쓰여지고, 그 이후로도 한참 후에 나뉘어 진 것이다.

성경이 쓰여졌을 때는 성경의 장과 절이 없었다.

그런데 2절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곳에서의 신령한 자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억지 같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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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성경에서 온전, 혹은 신령한 자들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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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나님은 너희는 완전(온전)해라, 라고 명령하셨다.

여기서 온전은 완전을 뜻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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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기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온전은 완전을 뜻한다.

(엡 4:13, 빌 3:15, 골 1:28 등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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신자를 봐도 그렇다.

신자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.

믿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가?????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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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어떤 학자들은 온전(완전)은 다른 성도들보다 성숙한 상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.

왜 이렇게 표현하냐고 하면, 그리스도인들은 온전(완전)해 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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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가 온전(완전)해 질 수 없다면,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(완전)해 지라고 명령하셨는가!!!!!

완전해 질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 맞지 않을까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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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에서 노아는 완전했다고 표현하고 있다.

이렇게 이야기 하면, 술 취해서 골아 떨어진 것으로 완전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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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과 다를 수 있다.

한 번의 실수가 과연 완전을 가릴 수 있을까?

인생의 한번의 실수로 인해 인간이 완전할 수 없다고 보는 시선이 맞을까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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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윗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완전했다.

그럼 밧세바 남편을 죽인 사건은요?라고 할 수 있겠다.

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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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나님 보시기에 밧세바 사건 외에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라고 표현한다.

즉, 온전하게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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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무엘은?

수 많은 선지자들은?

요셉은? 아브라함은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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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온전(완전)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신앙생활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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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으면 신앙 생활을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.

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더 다다를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, 자신을 바꾸어 간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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완전해 질 수 없다고 믿으면, 어짜피 이룰 수 없는거 쉽게 포기하게 된다.

누구도 완전해 지지 않았다며, 자신을 위로한다.

예수님 앞에서 완전해 지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.

​

과연 어느 것이 맞을까??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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